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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오산에서 살며 초대작가로 활동

소전(素荃), 우죽(友竹) 선생 계보 잇는 팔순 서예인

신호연 기자 | 기사입력 2022/11/21 [16:01]

4대째 오산에서 살며 초대작가로 활동

소전(素荃), 우죽(友竹) 선생 계보 잇는 팔순 서예인

신호연 기자 | 입력 : 2022/11/21 [16:01]

  © 화성오산신문

 

증조부 때부터 4대째 오산시 양산동에 살면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인경(仁耕) 문경호(文景浩) 선생은 오늘도 붓끝으로 세상을 연다.

한신대학교 아래 언덕에 햇볕과 전망이 좋은 문경호 선생 댁을 찾았다. 

그는 현재 인경서예술연구회 회장, 한국서학연구소 회장, 우죽연묵회 상임고문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 서화공모대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서화예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500평 대지에 자리 잡은 화양당(華陽堂)은 증조부 때부터 살던 터에 지은 것으로 인경(仁耕) 자신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호 화양당(華陽堂)은 옛 지명 화성군 오산면 양산리에서 땄다. 빛날 화(華) 빛 양(陽)자에 ‘햇볕이 아주 따스하게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증조부는 이 지역에서 면장을 지냈고, 조부는 유학자로 시서화(詩書畵)를 좋아해 인근 수원, 화성에서 시서화(詩書畵)를 하는 선비들이 아름아름 모여들어 사랑채는 항상 그들의 마실터가 됐다. 

장손으로 태어난 인경(仁耕)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들과 함께 사랑채에서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서예문화를 체득하게 됐다.

 

동고(東皐) 류근홍(柳根洪) 선생께 사사

 

다섯살 때 처음 붓을 잡은 인경(仁耕)은 국민학교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수원북중에 입학, 국전 작가였던 동고(東皐) 류근홍(柳根洪) 선생의 친절하고 세심한 지도를 받아 기본기를 다졌다.

그 당시는 서예(書藝)가 학교 정규 과목이었기에 동고(東皐)선생이 서예, 한문, 국어, 유도 등을 가르쳤다.

동고(東皐) 선생은 국전 작가이면서 당시 수원북중을 전국대회 유도 우승으로 이끈 무도인이기도 했다. 

선생은 당시 중학생 인경(仁耕)의 재주와 노력을 인정해 특별히 아꼈고, 인경(仁耕)은 중학교 때 동고(東皐) 선생과 만난 것을 인생의 큰 복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수원농고 1학년 때 제1회 전국학생휘호대회가 열렸는데 고등부 3등 상을 받아 당시 도내 학생부에서 손꼽히는 재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3년 한일합섬 기획조정실에 근무하면서 신규 사업 타당성을 검토했던 사업군 가운데 하나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택해 창업했다. 이어 1991년 중국으로 진출, 하얼빈에 4만5천평짜리 공장을 짓고 준공식과 함께 첫째로 가진 공식행사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10명을 초청해 현장휘호를 진행할 정도로 서예를 향한 열정은 남달랐다.

당시 컴퓨터 관련 사업은 중국에서 중점항목기업으로 선정되고 삼성, 후지쯔 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사업은 큰 어려움에 빠졌고 밤잠을 설치며 고민 끝에 결국 사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3년간 중국 생활에서 중국의 서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서예 관련 자료를 모으고, 현재 서예가들과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 실제로 붓을 잡지 못했을 뿐 그냥 잃어버린 세월만은 아니었다.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선생의 문하로 입문

 

200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우죽(友竹) 선생은 1974년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해서, 행서, 행초서의 세계적인 대가로 한국서예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서예 문화 발전을 위해 60년간 6천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길러 내는 등 우리나라 서예문화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우죽(友竹)은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선생의 제자이다. 

8.15 광복 이후 서단의 원로로 우리나라 서예발전을 이끈 소전(素荃) 선생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書藝)라는 말을 창안한 장본인이자 정치가다. 

또한 소전(素荃) 선생은 일본으로 유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되찾아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대표 서예가들의 조사, 

분석으로 시작

 

인경(仁耕)이 처음 시작한 일은 우리나라 역대 국전에서 4회 이상 입선한 서예인들과 심사위원들을 추출해 연명부를 만들고, 그들의 작품과 자료를 수집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작품이나 자료를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책방에서 구입하거나 복사해 서체별로 분류 작업을 통해 책을 만들었다. 인경(仁耕)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 작업을 1년간 하고나니 대한민국 서예가들의 글씨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거야. 그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걸 어떻게 하지? 저 친구는 저 앞에 있는데 이제 시작해서 잘될까?’ 걱정했었는데 분석을 끝내고 보니 대한민국 서예가들 수준이 보이는 거야. 가만히 생각하니 따라갈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따라가지 생각하니 ‘축지법’밖에 더 있겠냐 싶더군. 그들이 1시간 하면 나는 서너시간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들의 집중도가 50이면 나는 100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던 거야”

회사와 사업에 얽매여 제대로 잡지 못했던 붓을 남들의 네다섯배로 열심히 잡고 썼다.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우죽(友竹) 선생 문하로 입문한지 3,4년쯤 되던 무렵 선생이 “인경(仁耕), 공부방 좀 구경시켜 줘”라고 청했다. 안산 오피스텔에 기거하면서 1층은 연구실, 2층은 차실(茶室)을 만들어 놓고 혼자 수없이 밤새워 글씨를 쓰던 시절이었다. 

우죽(友竹) 선생이 공부한 내용을 쭉 들춰 보고 “됐어, 잘하고 있어. 이대로 10년만 열심히 해. 그러면 틀림없이 대가가 될 것이야. 내가 보장해”라며 격려했다.

이때부터 우죽(友竹)은 인경(仁耕)을 드러내 놓고 칭찬했고, 2010년 우죽(友竹) 선생 개인전을 맡아 준비한 일을 계기로 본격 후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우죽(友竹)은 인경(仁耕)에게 ‘인경세교(仁耕世交)’라는 글을 써 주며 제자이자 친구로 대하면서 후계까지 부탁할 정도였다.

인경(仁耕)과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부인 하정숙 여사는 음식 연구가다. 인생의 반려자로 남편의 서예를 적극 지지하는 다도(茶道)의 벗이기도 하다.

하정숙 여사는 인경(仁耕)의 글씨에 “글자의 구성과 배치를 보면 타고 난 천재성이 느껴져 감동한다”고 말한다. 

인경(仁耕) 또한 “내가 이렇게 서예에 전념하게 되는 열정은 아내 덕이거든. 시서화, 문학, 음식문화를 지향하는 정서가 나와 같아. 항상 그 속에서 마음을 함께 느끼고 사니 그것 또한 좋은 거야”라고 화답한다. 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잘 익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심정필정(心正笔正), 서여기인(書如其人), 

심청사달(心淸事達)

 

심정필정(心正筆正)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바로 그 사람을 나타낸다.

 

심청사달(心淸事達)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

 

인경(仁耕)은 ‘위 세 문구를 마음에 새기고 기본에 충실하라’고 충고한다. 마음은 딴 데 가 있고, 글씨 형태만 가지고 오려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단지 붓 움직임만으로 그림인지 글씨인지 모르게 꾸며내는 눈속임을 경계한다. ‘글씨는 형태가 온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서예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노후에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야. 팔을 움직이는 능력만 있으면 쓸 수 있어. 글씨를 쓰는 내용은 전부 주옥같은 이야기들로 그걸 읽고 생각하면서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좋은 친구가 돼 줄 것이야”라고 적극 추천한다.

 

2023년 가을에 개인 전시회 준비

 

요즘 인경(仁耕)은 2023년 가을 개인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우죽(友竹) 선생 유작 전시회, 우죽(友竹) 선생과 인경(仁耕)의 사제전(師弟展)이 될 수 있다. 

정신의 토대 위에 정성을 다해 쌓은 결과물들로 이 사회에 울림을 주고 싶다. 인경(仁耕)은 이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고 뛴다. 인경(仁耕)은 우죽(友竹) 선생과 선생 부인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 서예 문화 발전을 위해 그의 유작 400점을 오산시에 기증하는 것을 제안했다. 

자료가 있어야 역사가 되고, 후대에 이 기록들을 토대로 공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에 기꺼이 기증해서 공유하고 싶은 의지 때문이다.

향후, 해서, 행서, 초서에 당대 세계 1인자로 평가되는 우죽(友竹) 선생 기념관이 건립되면 오산시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오산시가 우죽(友竹) 선생 기념관을 만들어 주면 그의 유품 400점과 인경(仁耕) 본인의 작품들도 기증할 생각이다.

재산가치로 따지면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작품들을 기증하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우문(愚問)에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야. 지금 이 나이 되니까 큰 재물을 탐내는 욕심은 불필요한 것이야.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지가 중요하지.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그런게 가장 중요하지”라고 현답(賢答)한다.

우죽(友竹) 선생의 유작전과 기념관 건립 계획이 구체화되면 이것이 하나의 마중물이 되어 소전(素荃) 선생을 비롯한 우리나라 유명한 서화가들의 작품을 기증받는 계기가 되고, 향후 오산이 우리나라 서화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역할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신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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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픔 2025/07/23 [05:36] 수정 | 삭제
  • 2025년 7월 14일자 신호연 기자님의 기사 중 선묵화가 담원 김창배 선생님을 따라가다가 인경 문경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네요. 한신대 아래에 자리잡고 계신다는 소식에 반가웠습니다. 한국서예의 맥을 이어가시는 인경선생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해주시니 많은 귀감이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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