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의 일이니까 22년이 지났다. 당시 패총, 고배, 석침, 토기류 등 다량의 문화재가 매장돼 있어 경기도 최대의 고분군으로 알려진 유적지가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도로 확·포장공사를 벌이면서 마구 파헤쳐져 고분군 일대와 산자락이 흔적도 남지 않을 뻔했다. 이 유적지는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처음 소개되면서 수습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여주시 상동(매룡리, 상리) 일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유적 발굴이 시작되어 한강유역의 신라 고분군 중 충주의 누암리 고분군과 함께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 그에 따른 점령지역 통치방식을 연구하는 고고학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이 사건의 발생은 개발에 따른 민원 발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당시 발굴 조사에 참여했던 서울대와 한림대 박물관 관계자들은 매룡리와 상리 고분군지역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이후, 경기문화재단은 ‘매룡리 고분군’에 대해 문화재보호지구 지정을 추진하여 2002년 5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 180호로 지정됐다. 관심을 갖는 일이란 계기가 따르기 마련이다. 문화재를 지켜야 한다는 상식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기억은 처음이다. 막연하게 품고 있던 문화재의 가치와 그 소중함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던 때로 기억한다. 역사는 과거로 덮어버리면 지나간 일로 끝나버리지만 보존하고 학습하면 우리가 바라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경로를 예시해 주기도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한강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유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맥락과 상통한다고 보면 해답은 명쾌하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보았던 그들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정성은 두말이 필요 없다. 원형경기장으로 잘 알려진 콜로세움은 로마제국 말기 두 번의 대규모 지진 발생(442년, 508년)으로 크게 파손됐지만 그대로 간직하여 아직도 최고의 버킷리스트 관광지가 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옛 가옥의 움푹 패인 터와 깨진 성벽조차도 울타리를 쳐 놓고 소홀히 하지 않는다. 도시 한가운데 길을 막고 세워놓은 문화재 영역에 불편을 표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일본의 잔재라고 없애버리고, 조선시대 인조왕의 굴욕이라고 낙서를 하고, 화가 난다고 불을 지르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문화재는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모두가 지켜야 하는 유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저작권자 ⓒ 화성오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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