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부-제22회 노작문학상 주인공에 조정(趙晶)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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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노작문학상 수상자 조정(조정) 시인을 만났다. 그는 1956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詩) 부문에 당선됐다. 시집으로 ‘이발소 그림처럼’, ‘너랑 나랑 평화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등이 있다.
시상식은 10월1일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열렸고 상금 3천만원이 주어졌다. 다음은 조정 시인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얼마 만에 낸 시집입니까? 오랫동안 근황을 접하지 못하다가 지난 폭염 때 이 시집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 첫 시집을 낸 지 15년 됐습니다. 2011년부터 3년간은 강정마을에 협력했고 이후에는 난해한 환경운동에 붙들려 있었어요. 제가 능력의 용량은 평균 이하인데 과제가 주어지면 매달리는 성향이라 두 현안 모두에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써도 정리하고 묶는 걸 못했어요.
세상에! 저는 처음에 ‘그라시재라’가 외국어인 줄 알았어요. 전라도 영암에서 숱한 말 중에 딱히 이 말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까?
▲ 광주에 사는 제 친구도 스페인어 ‘그라시아스’의 변형인 줄 알았다 해요. 이 책의 무게가 전쟁 후일담의 아픔으로 기울어 다른 아름다운 내용이 약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편집자가 “그라시재라 어때요?” 하시기에 듣는 즉시 찬성했어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너그러움과 받아들임’을 상징하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발음도 매끄럽고 좋잖아요.
제가 책에서 접한 최초의 전라도 사투리는 김영랑의 ‘오메 단풍들겄네’였어요. 돌이켜보면 영랑이 전라도 사투리의 음악적 요소를 시의 영토로 끌어들인 건 아주 선구적이었어요. 강제로 모국어를 빼앗겼던 사실을 생각할 때 꽤 중요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세계시장경제가 우리말을 학대하고 있지요. 저는 수천 년 민중의 삶이 일군 생태공동체, 문화공동체가 낳은 언어를 신의 것, 자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이 생겨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시 전편을 굳이 생득(生得)된 언어로 쓴 까닭이 무엇일까요?
▲ 옛날에 들었던 할머니들 이야기를 버리기 너무 아까웠어요. 처음에는 전형적인 시의 형식으로 쓰다가 너무 권태로워서 기억나는 대로 대화를 적기 시작했어요. 지문 없는 대화체가 의외로 구구절절하지 않고 할 말만 하는 맛이 있었어요. 툭 던져져 대화의 행간을 넓혀 주는 무심한 한 문장이 생성되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이런 대화체가 여러 명의 대화로 적용되어도 의미 전달이 수월한지 살살 시도해 봤지요. 이때 ‘표준말 지문이 받쳐주면 더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느꼈지만 바로 접었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전라도 말에게 못할 짓인 거예요. 연두연두한 고운 몸에 강철로 조인 코르셋을 입히는 것 같잖아요.
탯말로 글을 쓰니 글이 아니라 음성 지원되는 말을 받아 적는 때가 많았어요. 제가 제 기억을 채록하는 거죠. 따당 탕 딱 치고 도는 박상천 선생의 북소리 틈새 같은 말의 경쾌함이 짜릿했어요.
인생에게 무단히 두드려 맞아 송신나게 슬프고 아픈 판에 예술적 해학이 쑤욱 눈물 젖은 망사버섯처럼 펼쳐지는 게 전라도 말의 매우 유연한 특성 중 하나잖아요. 그건 내지르는 자기 방어도 아니고 의뭉스러운 되침도 아닌 단독 비상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치술신모, 그리움의 신들’에서도 마음 둘 데 없는 낙심을 새타령조 사설로 끌어올리고 가벼운 꼬집음 같은 농담으로 전환한 후 노동과 기도로 일상화하는 과정이 펼쳐져요. 표준어의 세계에서는 승화라고들 하는데, 저는 일상화라고 생각합니다. 제 탯말의 문화 배경에서 비애란 승화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을 다지는 것이었어요.
그곳의 자연과 관련이 없는 건 전통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과연 이 시집에 가득 찬 대지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구어로 전달되지 않으면 뜻이 훼손되기도 하고요. 더구나 전라도 사투리는 오랫동안 하층 문화를 상징하는 기호로 희화화되었죠.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로 시를 썼을 때 독자가 잘못 읽을 수 있다는 염려나 불안은 없었는지요?
▲ 있었습니다. 전라도 말로 쓴 시집이라면 표지 들추기도 전에 깡패의 말, 식모의 말, 저자 왈패들의 말을 떠올리겠네라는 생각, ̒니들이 전라도 말을 알아?’라고 실체 없는 누군가에게 묻기, 나 혼자 전라도뽕에 심취해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긴장, 60년대 전라도 농촌 여성들이 나누었던 이야기의 보편성에 대한 근심들이 기본적인 압박감이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누가 이걸 책으로 내주겠는가라는 한숨도 있었어요.
언어는 수백 년 내려오는 동안 설득력이 강한 개인들이 저마다 돌 하나씩을 쌓아 올려서 만든 일종의 기념비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어는 ‘민족문화의 주거지’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 문구의 소설이 집단적 기억에서 지워지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퍼뜩 그 생각이 나는데, 이문구 선생은 충청도 사투리를 “오랜 세월 동안 동의할 수 없는 지배 세력 밑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영암, 강진 사투리에도 그런 역사성 같은 게 있겠지요? 이 시집에 담긴 심성들, 체험들, 그런 현대사의 굴곡들이 전라도 어문구조에 영향을 미친 바가 있을까요?
▲ 권력이나 지식이나 하다못해 뜻이라도 가진 사람들이 일으키는 역사의 바람 앞에서 삐삐풀 뽑히듯 부러지는 사람들의 말이 백주대낮에 호령하는 말은 못 되겠지요. 3공 때부터 유독 전라도 사람들은 본적지를 서울로 옮겨야 자식들 직장이라도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래봐야 “말은 된디 억양이 안 된당께”라는 고민이 남았어요. 머뭇머뭇거리는 ‘거시기가 머시기’라는 것도 압박받는 사람들의 언어적 피신처였겠지요.
‘그라시재라’ 원고를 쓰면서 전라도 말은 조사 없이 소통이 잘되고 오히려 리듬감이 살아나는데, 표준말에 많이 오염됐구나 생각했어요. 구개음도 소리 나는 대로 적었지만 의미가 혼돈되지 않고 오히려 글이 예뻐 보였어요. 보편 규범의 틀을 둔 채 자유롭게 방언을 활용하는 풍조 속에서 적합한 말들을 일상어로 편입시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표준어 어문규범을 벗어던지는 지역 글쓰기를 전문 작가들이 시도해 볼 만합니다. 사투리로 글 써도 아름답고 할 말 다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현대사 굴곡들이 전라도 어문구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김형수 선생님께 제가 따로 듣고 싶습니다.
모든 권위 있는 상에는 다른 한편으로 권위 있는 문화를 주류로 만드는 함정도 있습니다. 가령 20세기의 아프리카 작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동안에도 그들의 모국어는 멸종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이제 한 기념비를 만든 시인으로서 ‘그라시재라’가 집대성한 영암 사투리에 내포된 가락과 사연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 같은 게 혹시 있으실까요?
▲ 애정보다 더 큰 궁금함이 있어요. 영암이 마한의 고대도시였기 때문인지 저는 역사 속에서 쓸어내듯이 사라진 마한과 백제의 노래들이 궁금해서 전라도 말의 결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합니다. 문자와 불교를 맨 먼저 받아들인 문화지역이고 사람들의 예술적 흥이 지금도 넘치는 곳인데요. 그 많은 노래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 가사들이 향가에 비하겠나 생각해요.
시집 속의 ‘난초 하나씨’는 가야금 명인 김창조 선생인데요. 영암 사람들의 심성에는 가야금 산조의 애틋함, 월출산 기암괴석의 영원성, 자주 끼는 아침 안개의 무상함, 상대포에서 먼 바다 해로를 열고 가던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영암은 전남에서도 가장 봉인이 덜 뜯긴 지역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가 편집자를 잘 만나는 것은 아주 큰 행운에 속합니다. 출판사 이름을 처음 듣는데, 공력도 많이 들였을 뿐만 아니라 편집 형식도 매우 돋보였어요. 출간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 이소노미아는 1인 출판사에요. 대표이자 편집자의 본업이 변리사인데 좋은 책 내는데 삶을 할애하는 특별한 사람이죠. 처음 제 시집 출간 부탁하니 난감해 했어요. “시집은 단독으로는 힘이 없어요. 힘없는 시집끼리 서로 힘이 되는 큰 출판사라야 시집이 살아남을 거”라고, 만약 그 출판사들이 안 한다고 하면 해보겠다했어요. 다행히 큰 출판사에서 안 내주겠다고 했고 이소노미아가 맡았죠. 서울내기 편집자가 내용을 이해할까 걱정했는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너무나 좋습니다. 방언이 빠진 한국어는 빈약하다는 걸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라도 말로 된 시집을 편집하는 건 제게 너무나 명예로운 일이에요.” 표지 디자인, 본문의 그리드 설정, 방언사전 제작, 제본 등 시집은 시집답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출판사 통장 탈탈 털어 제작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많이 팔려야겠지요.
서효인 시인의 해설도 얼마나 잘 읽었는지 몰라요. 책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고 봅니다. 시인으로서 그런 발문을 받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 아, 얼마나 고맙고 감동했는지. 편집자가 제게 바라는 게 딱 하나였어요. 발문은 젊은 시인이 써주면 좋겠다고요. 제 또래 늙은 시인들과도 교류가 없는 제가 젊은 시인, 더군다나 전라도 말과 문화를 이해하는 젊은 시인을 알기가 어렵잖아요. 서효인 시인이 떠올랐고 전화했어요. 생전 교류도 없던 선배가 “내가 전라도 말로 시집을 내는데 니가 발문 좀 써줘야 것다.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다”하니 난감했겠지요. 선량한 효인이 속수무책 수락했는데, 발문 도착한 날 편집자 축제일이었습니다. 발문 받고는 약 먹은 듯이 생기가 펄펄 나더라구요.
공교롭게도 수상작으로 뽑힌 날짜가 8ㆍ15 기념일이었지요? 노작 홍사용의 정신을 선양하는 차원에서든 또 방황하는 한국 인문정신에 도전적인 발언을 던진다는 차원에서든 조정 시인이 상을 받는 건 매우 시의적절하고 뜻깊은 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미학적 가치 외에도 풍속사적 가치, 토속적 가치를 함께 갖는다고 보는데, 혹시 고향 분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 서울 사는 친척들께서 잊었던 말들이랑 이야기들이 다 담겼다고 기쁘고 자랑스러워 하시더라구요. 말에 긴장하며 살던 분들이라 천대받는 전라도 말이 시가 되어 나타나니 벅차신 것 같아요. 80대인 숙모님 한 분은 “어릴 때 고향 떠났는데 어떻게 그걸 다 기억했능가. 울고 웃고 그래그래 나도 그랬었지 하며 읽었네. 남 얘기가 아냐!”라고 카톡을 주셨어요. 광주 사는 친구는 “나는 종일 이 책 이야기만 하고 싶어서 사람만 만나면 말하네” 그래서 웃었고요. 상 받았다는 소식 듣고 “상금이 많은 것 봉께 권위가 있는 상이구만이”하신 분도 계셔요.
‘그라시재라’는 실로 많은 공력을 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다음 시집이 기대되는데요. 앞으로도 특별히 하고 싶은 작업이 있습니까?
▲ 일단은 노트북을 비우고 싶어요. 8년 동안 집중했던 골프장 백지화 운동 과정에서 쓴 시, 열두 시인이라는 크리스천 시인들 동인지에 매년 실었던 성경 기반의 시까지 이래저래 쌓인 시들을 갈래지어 정리하고 출간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은 크고 오래된 소망인데요. 옹관을 주제로 시를 더 쓰고 싶어요. 첫 시집에 ‘옹관’ ‘옹관에 누워’ ‘애기 옹관’이라는 시 세 편을 실었어요. 제게는 삶과 죽음, 물과 불과 흙과 인간의 집중이 가장 치밀하게 담긴 대상이 옹관입니다. 옹관 유적지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성거립니다. /이미숙 기자